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려후 추 (문단 편집) == 결론 == 모두 그럴듯하게 서술해놓기는 했지만 사실 현재 학계에서 확정적인 정설은 없는 상태이다. 게다가 구려후 추의 존재를 삼국사기를 신뢰하여 연비라 보는 견해도 국내에 소수 존재[* 과거만 해도 이쪽이 다수설이었는데, 대표적으로 [[이병도]]가 자신이 번역한 역주 삼국사기에서 주장했다. 시간이 지나며 이에 대한 의견이 역전된 것.]하며, 이 경우 연비(延丕)는 연타발(延陀勃)과 성씨가 같아 [[소서노]] 측 부족장으로 보는 추측이 있다. 만약 주몽설을 따를 경우 고구려 초기사를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기에 구려후 추의 존재만 놓고 함부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이다. 물론 구려후 추가 추모를 호칭하는 기록이라는 학설이 일단 현재로서 주류설이기는 하나, 저 기록 자체가 프로파간다라고 보는 견해가 다수라 저 기사 자체를 그대로 신뢰하고 있지는 않다. 본문에서 삼국사기가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치욕을 감추기 위해 어느정도 조정해 기록한 기록을 따랐기에 오류일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반대로 중국 사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위 시점보다 더 뒤인 정사 삼국지도 기리영 전투 같이 중국측 전공이 과장해서 서술한 기록이 많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의 전투에서 붙잡힌 것이 실제로는 고구려의 지도자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 특히 왕망이 다스리던 신의 여론과 분위기 등을 고려하면 프로파간다가 분명히 필요하긴 했다. 또한 여기서 언급되는 추=추모라고 하더라도 그게 정말 인물로서 동명성왕 추모를 뜻하는지, 고구려군의 지휘관을 일컫는지, 혹은 고구려의 당시 지배자를 뜻하는지도 불분명하다. 때문에 고구려와 신의 전쟁 중에 고구려의 군을 이끄는 누군가가 잡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가 사실상 신에 의해 격하 되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나 그 대상이 고구려의 지도자였는지 장군 중 한명이었는지, 지도자였다면 주몽인지 유리왕인지 등은 모두 현재 추가 사료 없이는 명확한 정답이 나올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